『면도날(The Razor’s Edge)』는 서머싯 몸(Somerset Maugham)의 대표작으로, 전쟁 이후 삶의 의미와 영혼의 방향을 잃어버린 한 남자가 ‘구원’을 찾아가는 여정을 그린 소설이다. 이 작품은 인생의 목적, 사랑의 방식, 인간의 내면적 고독을 특정 사건이 아니라 ‘길을 잃은 인간들의 관계’를 통해 서서히 보여준다. 특히 주인공 래리 래리모어의 독특한 인생관과, 그와 얽히는 주변 인물들의 현실적 욕망이 대비되며, 소설은 “행복이란 무엇인가?”, “성공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어떤 삶을 선택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집요하게 던진다. 작품 전체는 마치 면도날처럼 날카로운 선택의 길 위에 선 사람들의 이야기이며, 각자가 내려야 하는 선택의 무게를 조용하면서도 깊게 담아낸다.

래리의 방황 — 전쟁 후 삶의 의미를 잃은 한 청년
이야기의 중심에는 전쟁에서 살아 돌아왔지만 그 경험 때문에 삶의 목적을 잃어버린 청년 래리가 있다. 전쟁 이전에 그는 넉넉한 집안, 약속된 성공, 아름다운 약혼녀 이사벨 등 모든 것을 갖춘, 어떤 의미에서는 ‘승리의 길’이 이미 보장된 인물이었다. 그러나 전쟁의 참혹함과 죽음의 근접함이 그의 세계관을 무너뜨린다. 그는 더 이상 부와 사회적 지위를 인생의 목표로 삼을 수 없음을 깨닫는다. 전쟁 속에서 구한 한 병사의 죽음이 그의 삶을 영원히 뒤흔든다. 자신이 살려낸 사람은 몇 시간 뒤 죽었고, 자신은 멀쩡히 살아남았다. 이 경험은 래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묻게 만든다. “왜 나는 살아남았는가? 살아남은 나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래서 래리는 기존의 성공 경로를 벗어던지고, 책을 읽고 철학을 탐구하며, 유럽과 인도의 수도원을 거쳐 자신만의 답을 찾아 나선다. 그는 돈벌이보다 ‘깨달음’을, 편안함보다 ‘진실’을 선택하고자 한다. 이 방황은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영혼의 탐색이다. 래리는 세상이 제시한 ‘행복의 공식’을 신뢰하지 않는다. 대신 인간이 본질적으로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지를 탐구한다. 그는 종교, 철학, 노동, 고독을 모두 경험하며 깊은 깨달음을 얻어 간다. 하지만 그의 이런 선택은 주변 사람들에게 종종 당혹감과 의문을 준다. 래리가 원하는 삶은 너무 비현실적이고, 너무 비경제적이며, 사회적 기준에서 보면 ‘실패자의 길’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소설은 인간의 기준, 욕망, 가치관이 얼마나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하는지를 날카롭게 보여준다.
이사벨과 주변 인물들 — 욕망이 서로를 가르는 비극적 관계
래리의 약혼녀 이사벨은 이야기의 또 다른 축이다. 그녀는 래리를 사랑하지만, 동시에 물질적 안정과 사회적 지위를 포기할 수 없는 인물이다. 그녀는 래리가 자신에게 돌아오길 바라면서도, 그의 선택이 자신이 원하는 안정된 미래와 충돌한다는 사실 앞에서 혼란을 겪는다. 이사벨은 처음에는 래리의 탐구심과 독특한 삶의 방향을 이해하려 노력한다. 하지만 점점 두 사람의 가치관은 멀어지고, 그녀의 마음 한편에는 래리가 자신을 위해 좁은 길(면도날 길)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서운함’이 자리 잡는다. 결국 이사벨은 래리를 붙잡는 대신 자신이 원하는 삶을 선택한다. 그녀는 래리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지 못하면서도, 일정한 순간에는 자신의 욕망을 위해 잔인한 선택을 내리기도 한다. 이사벨의 남편 그레이는 선량하고 성실한 인물이지만, 경제공황으로 집안이 무너진 뒤 큰 좌절을 겪는다. 이때 래리는 그레이의 두통을 독특한 집중력과 지식으로 치료해 주고, 그레이는 래리에게 깊은 존경을 느끼게 된다. 래리는 특정 종교적 신념에 의존한 것이 아니라, 마음을 깊게 가라앉히고 인간의 정신이 가진 잠재적 힘을 통해 그레이의 고통을 완화시킨다. 또 하나의 중요한 인물인 소피는 삶의 상처 속으로 떨어진 비극적인 여성으로, 래리가 깊은 연민을 느끼는 대상이다. 남편과 아이를 잃고 방황하던 소피는 래리의 도움으로 잠시나마 희망의 실마리를 찾지만, 이사벨의 질투와 욕망이 그녀에게 잔인한 파국을 불러온다. 이 소설은 선악의 이분법 대신, 인간이 사랑이라고 믿는 감정에 얼마나 많은 욕망과 집착이 섞여 있는지를 섬세하게 포착한다. 이사벨의 선택은 분명 비극을 초래하지만, 독자는 그녀가 완전히 악하거나 무심한 사람이 아님을 알고 있다. 그녀 역시 인간적인 약점과 두려움을 지닌 존재일 뿐이다.
결말과 주제 — 진정한 자유와 구원의 의미
후반부에서 래리는 삶에 대한 답을 조용히 완성해 나간다. 그의 깨달음은 거창한 종교적 진리도 아니고, 극단적 이상주의도 아니다. 오히려 소박하고 단순하다. 그는 ‘사람은 각자 자신이 갈 수 있는 길을 걸어야 한다’는 믿음에 도달한다. 어떤 이는 부와 성공이 어울리고, 어떤 이는 가족과 평온한 생활이 어울리며, 어떤 이는 고독 속에서 영혼을 찾는 길이 어울린다. 래리는 자신이 선택한 길을 양심적으로 걸으며, 남에게 무엇을 강요하지 않는다. 그는 타인의 삶을 판단하지도 않고, 자신의 선택을 미화하지도 않는다. 그저 조용히, 깊이, 자신의 의미를 자신의 방식으로 살아내는 사람이다. 반면 이사벨은 끝까지 래리를 잊지 못하면서도, 동시에 자신의 선택에서 벗어나기 어려워한다. 그녀는 사회적 안정 속에 머물지만 마음 한편에는 지우지 못한 상처가 남는다. 소피는 인간의 연약함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보여주는 비극적 존재로서 이야기를 마감하게 된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독자는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을 깨닫는다. 래리는 세상이 규정한 ‘성공’이나 ‘행복’을 따르지 않았지만, 누구보다 진실하게 자기 삶을 살아낸 인물이다. 그의 길은 좁고 위험한 면도날 같았지만, 동시에 가장 자유로웠다. 『면도날』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결국 이것이다. 인생의 목적은 남이 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는 순간에 완성된다. 그리고 그 선택이 힘들고 외롭더라도, 그것이 자신의 진실이라면 그 길을 걸을 가치가 있다. 이 소설은 독자에게 조용히 묻는다. “당신은 지금 누구의 삶을 살고 있는가? 남이 만들어 준 길인가, 아니면 당신만의 면도날 길인가?” 그 질문은 책을 덮은 뒤에도 오래 마음에 남아 있는 울림이 된다.